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가가 비트코인을 보유한다는 발상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정부는 법정화폐를 발행하고, 비트코인은 그것을 위협하는 존재처럼 여겨졌죠.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흐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국가 단위로 비트코인을 직접 보유하거나 법정화폐로 채택하는 사례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엘살바도르,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이미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채택했고, 일부 신흥국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의 일부로 비트코인을 고려하거나 구매를 진행 중입니다. 심지어 선진국들조차 민간 기업 및 기관을 통한 간접 보유를 확대하며 암묵적인 수용 태세를 보이고 있죠.
왜 이제 와서 국가들이 비트코인에 주목하는 걸까요? 단순한 투자 이상으로, 어떤 전략과 배경이 깔려 있는 걸까요? 이번 글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비트코인을 보유하기 시작한 근본적인 이유들을 다각도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1. 화폐 주권 회복: 달러 패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국제 무역과 자산 결제를 미국 달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타국 입장에서는 '금융 종속'의 구조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러시아, 이란, 북한과 같은 국가들은 미국의 경제 제재를 직접적으로 겪으면서, 스위프트(SWIFT) 시스템에서 차단되거나 달러 거래망에서 배제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는 곧 국가 자산이 외부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부 국가는 비트코인을 ‘중립적이고 검열 불가능한 가치 저장 수단’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미국 중심의 금융 질서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전략적 맥락에서 비트코인을 보유하게 된 것입니다.
2. 인플레이션 헤지 및 국가 자산의 분산 전략
2020년 이후 세계는 유례없는 통화 팽창을 경험했습니다. 팬데믹을 대응하기 위한 무제한 양적완화(QE), 저금리 기조, 공급망 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미국은 물론이고 여러 국가에서 물가가 급등했고, 통화의 실질가치는 급락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트코인은 발행량이 2,100만 개로 고정된 '디지털 희소 자산'**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금이 그랬던 것처럼, 비트코인은 인플레이션을 방어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으로 떠오른 것이죠.
엘살바도르의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자국 통화 없이 미국 달러에 의존하던 엘살바도르는 화폐 주권이 부재한 상황에서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함으로써 **통화 대체재이자 가치 저장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3. 전략적 투자자산으로서의 포지셔닝
국가들은 단순히 외환보유고를 달러와 금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점차 자산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있으며, 비트코인 역시 장기적인 리스크 헤지 및 수익 창출 자산으로 포지셔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특히 자원 의존도가 높은 국가나 경제가 불안정한 신흥국에서 두드러집니다. 석유, 금, 리튬 등 실물 자산이 국가 부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디지털 자산의 보유 여부가 미래의 재정 안정성을 좌우할 수 있다는 시각이 퍼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엘살바도르 정부는 일정 금액의 비트코인을 매일 매수하는 전략을 수립했으며, 2024년 기준 약 2,800 BTC 이상을 보유 중입니다. 이 자산은 국부펀드나 재정 비축 성격으로 관리되며, 향후 경제 위기 시 유동성 확보 수단으로도 기능할 수 있습니다.
4. 금융 인프라 접근성 확대와 디지털화 흐름 대응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금융 인프라가 미비합니다. 은행 계좌가 없는 인구가 다수 존재하며, 통신 인프라에 비해 금융 인프라가 뒤처져 있죠. 이러한 환경에서 비트코인은 은행 계좌 없이도, 누구나 지갑을 통해 자산을 보관하고 전송할 수 있는 **금융 포용(financial inclusion)**의 도구가 됩니다.
엘살바도르가 자국민에게 ‘치보(Chivo) 월렛’을 보급하고, 비트코인 사용을 장려했던 것도 이 연장선입니다. 정부 보조금, 송금 수수료 절감, 소액결제 등에서 **비트코인이 오히려 기존 금융 시스템보다 효율적**이었던 것이죠.
더불어 각국 정부는 디지털 전환 흐름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개발과는 별도로, 민간 주도 디지털 자산 생태계를 수용하고 참여하는 것은 **국가 경쟁력 확보 차원의 전략**으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5. ‘디지털 금’으로서의 상징성과 글로벌 위상 제고
비트코인을 보유하는 것은 단순히 자산 확보 그 이상입니다. 이는 해당 국가가 첨단 금융 시스템과 블록체인 기술에 대해 개방적이며, 글로벌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가라는 신호로 작용합니다.
특히 중남미, 아프리카 등의 신흥국들은 선진국의 규제와는 별개로 **디지털 자산에 대한 선도적 접근을 통해 국제적 주목을 받는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부켈레 대통령은 비트코인 정책을 통해 국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외국인 투자 유치, 관광 산업 활성화 등의 간접적 효과도 누리고 있습니다.
즉, 비트코인은 **국가 브랜드를 강화하는 하나의 외교·경제 수단**으로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결론: 비트코인을 보유한다는 것은 곧 ‘금융 전략’을 갖는 것이다
국가가 비트코인을 보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수익을 기대하는 투기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지정학적 리스크 회피, 금융 주권 확보, 인플레이션 방어,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이라는 다층적인 전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국가들이 비트코인을 보유하거나, 법정화폐와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채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는 국제금융 시장의 구조적 변화이자, 탈중앙화 자산이 가진 무게감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트코인을 여전히 ‘위험한 자산’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국가 단위로 진행 중인 이 조용한 ‘포지셔닝 전쟁’을 놓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